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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이야기 기획시리즈 Ⅱ] 서대문의 숨어있는 역사 이야기를 찾아서 - 도심을 걸으며 느껴 본 서울 600년의 역사와 홍제천-

서대문TONG 2013. 8. 27. 14:46

[서대문이야기 기획시리즈 Ⅱ] 

서대문의 숨어있는 역사 이야기를 찾아서 

<도심을 걸으며 느껴 본 서울 600년의 역사와 홍제천>


우리 서대문구 하면 떠 오르는 장소 중 하나인 홍제천! 



홍제천(弘濟川)은 우리역사의 아픈 한恨이 서려 있는 곳이며 또한  희망과 꿈을 품은 곳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서대문이야기 기획시리즈 두 번째 이야기 도심을 걸으며 느껴 본 서울 600년의 역사와 홍제천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김정호의 수선전도(한양전도,1824~1834)에도 나와 있는 홍제천의 모습, ‘홍제천’의 이름은 조선시대 중국의 사신들이 숙식을 하던 최초의 국립여관이던 홍제원이 있어 홍제원천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지금의 명칭도 이런 연유에서 붙여졌다고 하며, 고려시대에는 ‘홍제(洪濟)’로 쓰다가 조선 세종 이후부터 홍제(弘濟)와 함께 쓰였다고 합니다.



상류지역에서는 세검정이 있어 ‘세검천’이라고도 불리고, 모래가 많이 퇴적되어 ‘모래내’라는 지명 유래와 함께 ‘사천(沙川)’이라고도 불렸으며, 하류지역에서는 성산동을 거치면서 ‘성산천(城山川)’이라고도 불렸다고 합니다.



홍제천은 다양한 지명 이름 유래 만큼이나 각 유역별, 시대별로 많은 역사의 흔적과 문화유산, 또 우리 조상들의 애환어린 삶의 모습들을 남기고 있습니다.



홍세교터 또는 서석개다리 : 서석개(西石蓋)다리라고 불리던 이 다리는홍제교는 홍제동 323번지와 홍은동 217번지 사이에 있던 다리로 한양에서 의주로 통하는 길목에 놓아졌던 돌다리였는데, 고종 2년 흥선대원군이 홍제교를 파내 경복궁 중건에 쓸 때 민가에서 불리던 민요가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홍제원 너머 서석게다리 / 여러 천년 묻혔더니 / 경북궁 이룩시에 / 세상 구경 다시 했네.” 



‘70년대 타워팰리스’ 서대문 유진상가와 1960년 자연시장으로 뚝방에서 시작(홍제천 쪽) 1972년 시장개설 허가 된 인왕시장의 모습, 그리고 홍제천의 어제와 오늘.



인왕산 정상의 서울 성곽에서부터 북쪽의 능선을 따라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된 산성으로 길이가 약 5㎞에 이르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군사훈련과 수도방위를 위하여 북한산성을 축성하였으나 북한산성이 높아서 군량 운반이 어렵게 되자 세검정 부근에 있던 탕춘대(蕩春臺) 일대에 군사를 배치하고 군량을 저장하기 위하여 이 성을 축성하기로 하여, 원래 홍지문, 세검정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한산주(漢山州)로서 군사상 중요한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홍제천의 포방터 시장의 유래는 조선시대의 군사 사격장으로 이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성계의 꿈 서린 암자이며 서울 4대 기도도량, 옥천암, 옥천암은 원래는 신라시대 사찰인 ‘장의사’의 경내로 추정되나 현재는 작은 암자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 마애상은 ‘보도각 백불’ 혹은 ‘백의관음상’으로 불리는데, 이는 옷 부분이 흰색이며 ‘보도각’이라는 전각의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옥천암 마애좌상의 모습은 조각기법이 매우 투박하지만, 동그란 얼굴과 또렷한 눈동자, 오똑한 코, 작은 입술에서 풍기는 인상이 매우 부드러우며, 보통 마애불들과 달리 흰 가루로 칠한 옷을 차려입은 데다 연꽃무늬가 새겨진 화려하고 큰 보관을 쓰고 있습니다. 또한 금색이 둘러져 있는 커다란 귀걸이를 하고 있어 화려함을 더해줍니다.



태조 이성계에 얽힌 이야기뿐 아니라 흥선대원군의 부인이 고종의 복을 빌었다고 전해지는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지로 정할 때 기도를 올렸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고종의 어머니이자 대원군의 부인이 아들 고종을 위해 이곳에서 기도를 올렸다고 하니 한 왕조의 처음과 끝을 살았던 왕실 사람들의 기원이 모인 곳이기도 합니다. 약 5m 높이의 하얀 불상이 범상치 않아 절 안으로 들어갔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왜군과 힘든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다고 합니다. 당시 왜군이 서대문을 넘어 한양 도성으로 쳐들어갈 기세여서 권율장군은 더 이상 밀리지 않기 위해 옥천암을 요새로 삼아 배수진을 치고 홍제천을 사이에 두고 야간 매복을 하였는데, 깊은 어느날 밤 드디어 왜군이 밀려왔고 그때 왜군들 앞에 하얀 옷을 입은 장수(옥천암의 백불)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조선의 장수로 생각한 왜군은 일제히 총을 쏘았는데 총알을 다 쓰도록 총을 쏘았는데도 장수는 쓰러질 줄을 몰랐는데, 다음날 아침 총알이 다 떨어진 왜군들은 당황하여 허겁지겁 퇴각하기 시작했고 이때 권율장군의 군대가 일제히 반격하여 왜군들을 모두 전멸시켰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홍지문은 한성(漢城)의 북쪽에 있는 문이므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였으나, 숙종이 친필로 '弘智門'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달면서부터 이것이 공식적인 명칭이 되었습니다.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사천을 지나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하여 축성한 산성입니다. 이 산성의 명칭을 탕춘대성이라고 한 것은 현재 세검정이 있는 동쪽 약 100여m 되는 산봉우리에 탕춘대(蕩春臺)가 있었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며, 한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성(西城)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홍지문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으로, 화강암으로 중앙부에 월단(月團, 아치)이 꾸며지고, 그 위에 단층 문루가 세워져 있습니다.



세검정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궁궐지 宮闕志≫에 의하면, 인조반정 때 이귀(李貴)·김류(金瑬) 등의 반정인사들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씻었던 자리라고 해서 세검정이라 이름지었다고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동국여지비고 東國輿地備攷≫에는 “세검정은 열조(列朝)의 실록이 완성된 뒤에는 반드시 이곳에서 세초(洗草 : 史草를 물에 씻어 흐려 버림)하였고, 장마가 지면 해마다 도성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물구경을 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또한, ≪한경지략 漢京識略≫에는 “정자 앞의 판석은 흐르는 물이 갈고 닦아서 인공으로 곱게 다듬은 것같이 되었으므로, 여염집 아이들이 붓글씨를 연습하여 돌 위는 항상 먹물이 묻어 있고, 넘쳐흐르는 사천(沙川)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령폭포가 있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 밖에 세검정과 관련된 시로 정약용(丁若鏞)의 <유세검정 遊洗劍亭>이 있습니다.



석파랑은 6·25전쟁 직후 석파정이 ‘콜롬비아 고아원’으로 이용될 당시 멸실 위기에 처했던 석파정의 사랑채를 서예가 손재형 선생이 지금의 홍지동으로 이전한 것이 그 뿌리. 당시 손 선생은 석파정 사랑채와 순종왕후 윤씨의 생가 등 흩어져 있던 조선후기 건축물들을 옮겨와 새집을 지었고,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전시문화를 발전시키고 전시관 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만든 미술관으로 2008년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43 대일빌딩 지하1층에서 개관하였습니다.




서울특별시의 청운동과 부암동을 잇는 터널입니다. 예로부터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자하문고개 혹은 창의문고개라 하였고, 고개 마루턱에 자하문(紫霞門)이 있으므로 해서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자하문의 정식 이름은 창의문(彰義門)으로서 도성의 북문인 숙청문(肅淸門)에서 서쪽으로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 있답니다.



홍제역에서부터 홍제천을 따라 청와대, 경복궁까지 600년의 역사을 보고 느끼며 걸어보았답니다. 어제의 선조들의 꿈이 오늘에 와서야 조금씩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배웠고 내일의 우리의 방향을 헤아릴수 있는 의미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홍제천 명화의 거리 제막식 사진과 르누와르 그림입니다. 현재 서대문구민의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홍제천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홍제천을 따라 느껴 본 서울의 600년의 역사의 소중함에 대해 알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역사인만큼 우리가 보고 느끼고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