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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이야기 기획시리즈 4] 서대문의 숨어있는 역사 이야기를 찾아서 - "잊혀진 독립의 꿈을 찾아서 " -

서대문TONG 2013. 9. 11. 15:49

<서대문이야기 기획시리즈 4>

서대문의 숨어있는 역사 이야기를 찾아서 

"잊혀진 독립의 꿈을 찾아서 " -


지난번 독립문의 건립에 대해 이야기 했었죠? 

오늘은 잊혀진 독립의 꿈을 찾아서 라는 주제로 한번 이야기 해보기로 해요.



독립이라는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우리 서대문에도 많이 있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립문 등 많은 흔적들이 남아있답니다.




'독립운동가, 서재필 선생님'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 개화파의 일원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의사가 되었습니다. 미국으로 귀화하였으나, 일시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도 독립운동에 여러 방향으로 도움을 주었고, 광복후에는 미군정청고문으로 일하다가 미국에서 영면하셨습니다.


독립협회의 서재필(徐載弼)·윤치호(尹致昊) 등은 사대주의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모화관의 명칭을 고쳐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독립관으로 명명하고, 그 건물을 독립협회 회관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모화관 옆에 세운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는데, 이것 역시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손병희 등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만세를 삼창함으로써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의 불을 지폈습니다. 3.1독립선언기념탑은 이날의 숭고한 자주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 8월 15일에 당시 재건국민운동본부 주관으로 온 국민의 성금을 모금하여 3.1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이었던 탑골공원에 건립되었습니다. 
그러나 1979년 탑골공원의 정비사업으로 철거되어 12년간 방치되었다가 각 계에서 복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1992년에 항일 독립운동의 터전인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옮겨 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탑의 높이는 4.2m이며 탑 뒤에는 3.1독립선언문과 손병희 등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이 판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도 독립의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일본이 조선을 발판으로 하여 대륙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이에 저항하는 한국의 애국지사들을 투옥할 목적으로 1907년에 감옥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5백여 명의 기결수(旣決囚)를 수용할 수 있는 560여 평의 목조건물을 지었고, 1908년 10월 21일에는 오백 년 조선 왕조 내내 사용되었던 종로의 전옥서(典獄署)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기결수를 옮겨 온 뒤 이름을 경성감옥이라고 붙였다고 합니다. 

그 뒤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투옥하면서 수용할 공간이 부족하자 1912년에 현재 마포구 공덕동 자리에 다른 감옥을 지었고, 같은 해인 9월 3일 구 경성감옥을 서대문감옥으로 개칭하였습니다. 1918년부터 이곳 서대문감옥은 형무관을 양성하는 곳도 겸하게 되었다. 3ㆍ1운동 직후 유관순 열사가 투옥되어 숨을 거둔 지하 옥사와 감시탑, 고문실, 사형장, 옥사 7개 동, 역사전시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천국의 계단옆 달맞이 꽃 동산! 


얼마나 그리우면 꽃이 되었나? - 월견초(月見草)

"내가 좋아하는 꽃은 달맞이꽃이야."

"달맞이꽃이요?"

"밤에 피고 낮에 지는 꽃이지. 그러니까 야화(夜花)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독립의 역사를 떠올리며 서대문안산자락길로 향했습니다. 우리의 독립의 꿈을 향해 서대문의 안산자락길도 걸어보았습니다. 



서대문안산자락길 옆으로 나 있는 배초향과 국수나무는 주로 토양이 비옥하고 햇빛이 잘 들어오는 곳에서 자란다고 합니다. 




과거에 굿을 하던 밥상바위라 불리는 돌을 지나 지난과거와 현재를 볼 수 있는 흔적들을 쭉 둘러보았습니다.







저 멀리 서대문형무소역사관도 보이고, 일제강점기 일본이 경복궁을 불태우고 우리의 역사를 말살하려고 하자 서대문안산의 거북이가 승천하지 못하고 울었다는 설이 있는 바위도 보이는군요.



꽃의 색상이 방사선량에 따라 변이가 생기는 자주닭개비와 별을 사모하는 나팔꽃도 보이는데, 서대문형무소 감옥에 갇혀 돌아가신 원혼들이 밤마다 별을 보며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였던 마음이 느껴지는군요.





서대문안산자락길을 내려와 수경원터와 광혜원의 모습도 보이는군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은 미국인 선교사가 1885년에 만든 병원이 광혜원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은 대부분 의사를 겸임하였는데, 알렌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알렌은 갑신정변 때 부상을 입은 민비의 조카 민영익을 치료해 준 인연으로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고종의 도움으로 광혜원을 세워 운영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병원은 나중에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뀌고, 대한 제국 시대인 1899년에는 국립 병원인 광제원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이 병원은 서양 의술과 한방 의술을 모두 할 수 있는 병원으로 1907년에 ‘대한 의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환자 치료뿐 아니라 의료 요원까지 양성했고, 1904년에는 세브란스 병원이 설립되어 가난한 환자의 치료에 힘썼으며, 1909년에는 각 지방에 도립 병원인 ‘자혜 의원’이 세워져서 지방 사람들도 서양 의술에 의해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어 보이는 것은 수경원 [綏慶園]입니다. 1899년(고종 36)에 정자각과 비각을 새로 신축하고 비석도 새로 세웠는데 정자각과 비각은 연세대학교 내에 그대로 남아 있어 비각과 비석이 서로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영빈 이씨(?~1764)는 영조의 후궁 가운데 가장 총애를 받은 후궁으로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후궁 가운데 으뜸의 격식으로 성대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명하였다고 합니다.


독립문부터 쭈욱 걸어오면서 서대문의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근현대사를 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잊혀진 독립의 꿈이란 무엇일지 다시 한번 생각케 합니다.

우리 서대문에서 늘 볼 수 있었던 유적을 다시 한번 돌아보며 

날씨 좋은 가을 산책 한번 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