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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독립민주페스티벌]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 '을사조약' 이야기

서대문TONG 2012. 8. 7. 16:30

[서대문독립민주페스티벌]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 '을사조약' 이야기


8월의 달력을 들추면 한가운데쯤 빨갛게 표시된 숫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15라는 숫자인데요. 모두가 아시다시피 8월 15일은 우리나라의 광복절입니다. 일제 탄압의 굴레를 벗어던진 독립의 날. 대한의 역사에서 가장 큰 아픔을 품고있는 일제 강점기의 시작은 언제인지, 혹시 알고 계시나요?

"4천 년 강토와 5백 년의 사직을 다른 나라에 갖다 바치고, 

2천만 백성을 다른 나라의 노예로 만들었으니....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짧은 구절이지만 한 서린 목소리가 생생히 느껴지는 문장입니다. 

읽고 계신 분들 중에는 더러 익숙하게 느끼는 분들도 계실 듯한데요. 어떤 글인지 눈치 채셨는지요. ^^


위는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의 논설 중 일부입니다.

일제와 대한제국사이 을사조약이 성사된 후 그 아픔을 담은 글인데요.

오늘 하루 목놓아 통곡하노라! 는 제목의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입니다.


시일야방성대곡 전문


일제강점기라고 하면 보통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년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사실 그 이전부터 일제는 조선에 대한 침략의 손길을 스물스물 뻗고 있었습니다. 그 시작은 19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청-일 전쟁, 러-일 전쟁에서 모두 승리해 많은 이권을 차지하게 된 일본은 조선을 삼키기 위한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합니다.그리고 곧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를 파견해, 을사조약을 맺게 하는데요.


을사조약의 주요 내용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입을 막은 것이죠.

당장 나라를 넘겨주는 조약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우리의 뜻을 일본을 통해서 말해야만 하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1905년 11월 17일, 공식 명칭은 '한일협상조약', 고종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을사조약은 체결되고 맙니다. 한마디로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조약이었습니다.


을사조약 직후 한일 양측이 함께 찍은 사진: 맨 앞줄 가운데가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을사조약에는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사인이 없습니다. 고종은 이 조약에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어떻게 이 조약이 체결될 수 있었냐고요? 그것은 바로 그 회의에 참여했던 을사 5적의 찬성때문이었습니다. 을사5적은 친일파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입니다.

이들은 국제의 상황이 일본에 유리해지자 일본 쪽에 붙어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을사조약이 조선에 도움되는 일이라고 말하며 나라를 팔아먹은 것입니다.


이들은 이후 독립 운동을 하는 조선의 의병들을 탄압하기도 하는 등 죽을때까지 일본에 충성하며 살았고, 

그 태도는 현대에도 친일파라는 수치스러운 이름 아래 비난받고 있습니다.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이나 날씨 등이 왠지 스산하고 어두울 때 쓰는 말인데요.

이 말의 어원은 사실 '을사년스럽다'라고 합니다.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갔던 1905년 을사년이 민족에게 얼마나 음울한 시기였으면 이런 말이 생겨났을까요?


지난 일이라고는 하나 분명 과거 맺어졌던 이 조약이라는 이름의 강제 체결은 

후손인 우리가 지금에라도 널리 알려야 할 치욕과 분노의 역사임에 분명합니다. 


대한민국의 독립과 민주의 역사를 뜻깊게 기릴 수 있는

2012년 서대문독립민주페스티벌!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