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어보는 한국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
코로나19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지요. 답답한 마음을 뒤로 하고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을 읽기에 좋은 시간이 아닐까 해요. 나뭇잎들을 다 떨군 채 파란 하늘을 보며 의연하게 서 있는 겨울나무들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기다림’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네요.
아주 오랜만에 1920년대에 발표된 한국단편소설 중에서 현진건의 단편소설을 읽었습니다. 단편소설이 주는 매력에 빠져들면서 어쩌면 이렇게 절묘하게 시대상황을 묘사할 수 있었는지 연신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짧은 생을 살다 간 작가 현진건은 일제강점기에 홍사용, 이상화, 나도향, 박종화와 함께 <백조>의 창간동인으로 활동했습니다. 현진건은 1936년 동아일보사 사회부장으로 재직할 때,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일장기를 삭제한 사진을 보도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 일로 구속까지 되었고요. 그의 애국(愛國)정신에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13편의 단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운수 좋은 날>, <빈처>, <술 권하는 사회>는 특히 요즘의 코로나19사태로 어려워진 상황과 맞물려 묘하게도 대비가 되었어요.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여러 번 느끼며 읽었던 <운수 좋은 날>은 현진건 단편소설의 백미가 아닐까요. 위트와 해학,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비애와 삶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묻어났지요.
(소설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병들어 거의 죽어가는 아내는 인력거꾼인 김첨지에게 ‘오늘 하루는 내가 이렇게 아프니 나가지 말고 나가거든 제발 일찍 들어오라’고 했는데 그날따라 김첨지는 기적에 가까운 벌이를 하게 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친구를 만나 선술집에서 호기롭게 술을 마시지요. 빈대떡과 추어탕국 한 그릇을 마시고는 아내가 먹고 싶다던 설렁탕을 사들고 아내가 있는 집으로 들어갔는데....
1924년에 발표된 것이니 97년 전 이네요. 소설 속에 나오는 동소문동, 안국동, 남대문 시장 등의 지명이 친근하게 다가오면서 가난한 삶의 비애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일제강점기 시대를 살아 낸 민중의 비참함을 우회적으로 그려낸 이야기가 슬프기 그지없습니다.
단편 읽기는 새로운 즐거움이었습니다. 짧은 소설 속에 담겨있는 의미는 매우 크지요. <빈처>와 <술 권하는 사회>에 등장하는 아내들은 지아비를 위해 희생하고, 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내들입니다. 요즘엔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지금도 그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여인들이 있을 겁니다.
<B사감과 러브레터>는 지금 읽어봐도 어찌 그리 유쾌하고 즐거운지요. 여학교의 교사이면서 기숙사의 사감인 B여사는 마흔 살이 가까운 엄격하면서도 매서운 성격인데 노처녀인 B사감이 측은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공감이 되었지요. B사감이 싫어하는 것은 기숙사의 여학생들에게 오는 남학생의 러브레터와 면회인데, 늦은 밤 여학생들에게 온 러브레터를 쌓아놓고 연극배우처럼 남녀의 목소리를 바꾸어가며 읽는 사감을 상상해 보세요. 한밤중의 이상한 소리에 세 여학생이 발소리를 죽이고 찾아간 사감의 방에서 본 기괴한 광경은 생각만 해도 웃음이 터집니다. 세 여학생 중 B사감을 측은하게 생각하는 한 여학생의 ‘에그 불쌍해!’ 하면서 손으로 고인 때 모르는 눈물을 씻는 따뜻한 마음에 빙그레 웃음이 났습니다. 마음속에 고여 있는 사랑에 대한 갈망은 나이와 상관이 없는 것이지요.
단편소설 읽기는 이번 겨울에 발견한 새로운 즐거움이었습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한 두 편 씩 읽으며 소설 속의 주인공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려 합니다. 예전에 글쓰기 수업을 들을 때 소설가가 되려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필사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도 좋아하는 단편소설 1편 정도는 필사해 보는 계획을 가져 봅니다. 필사를 하면 잡념도 없어진다고 하니 마음 복잡한 일이 있을 때 필사에 도전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해 보면서 올해는 매월 한국단편소설 한 편씩을 읽고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