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이야기 기획시리즈Ⅰ]
서대문의 숨어있는 역사 이야기를 찾아서
- 독립문과 서대문독립공원 -
서대문 역사탐방~!
우리의 역사 속에 기록된 이야기들 중 오늘은 독립문과 서대문독립공원의 역사탐방을 한번 해 볼까합니다.
TONG과 함께 알아볼까요?
1. 자주독립국가임을 선언 - 독립문
- 독립문
독립문은 열강의 침략 야욕에 맞서 자주, 민권, 자강의 의지를 다지며 세운 주권수호의 상징물입니다. 1895년 2월,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徐載弼)박사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사대주의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1896년 7월부터 최초로 전 국민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한 성금으로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1896년 11월 21일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년 뒤인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하였으며 총 공사비는 당시 화폐로 3,825원이 들었다고 합니다.
- 서대문을 대표하는 문화재가 바로 독립문입니다.
독립문은 이름 그대로 민족의 자주독립을 다짐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입니다. 그러나 독립문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이 바로 독립협회입니다. 독립협회는 1896년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서재필 박사와 장지연 선생이 중심이 되어 구성한 단체입니다. 이를테면 독립협회는 ‘우리나라가 청나라의 신하가 아니라, 자주 독립국임’을 선언하기 위해 세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자주국가임을 만방에 선언해야 했을까요?
그것은 갑오개혁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1894~1896년에 일어난 갑오개혁은 말 그대로 잘못된 부분은 개선하고,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한 개혁운동입니다. 그러나 외국세력의 간섭으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나라의 자주독립 또한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온 국민의 의지가 강했습니다. 결국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이 독립문을 세운 것입니다.
- 사적 제32호
독립문은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원래는 현재의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약 70m 떨어진 독립문 네거리 중간지점에 세웠습니다. 그러나 1979년 12월 31일 성산대로를 개설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고 옛 자리에는 ‘독립문지’라고 새긴 표지판을 묻어 놓았습니다.
2. 영은문이 있던 자리
- 독립문이 있던 장소는 원래 영은문이 있던 곳입니다.
영은문은 병자호란 때 우리가 청에게 패배한 후 청의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만든 문으로 모화관 앞에 세웠습니다. 모화관이란 말은 ‘중화(中華)를 사모(私募)하는 마음에서 지은 집’이란 뜻입니다. 영은문이나 모화관이나 중국을 우러러보며 지은 것입니다. 조선에 임금이 새로 즉위하면 중국에서 사신이 옵니다. 새 임금이 조선을 다스리는 것을 허락한다는 문서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중국 사신이 오면 왕이 직접 이곳까지 나와서 의식을 갖췄다고 합니다.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줘서 고맙다는 뜻으로 그렇게 예를 갖춰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청일전쟁이후 독립협회는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는 뜻으로 이곳에 독립문을 세운 것입니다.
3. 독립문을 자세히 들여 다 볼까요?
-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
독립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입니다. 프랑스의 개선문을 모델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높이 14.28m로 45㎝×30㎝ 규격의 백색화강암 1,850여개로 세워졌습니다. 독립문 중앙에는 아치형의 홍예문 모양이 새겨져 있고, 대한민국 황실의 상징인 방패모양의 이화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또 위에는 독립문이라는 한글과 그 반대편에는 한자로 獨立門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4. 옛 모화관 자리에 세워진 독립관
- 독립운동의 중심지
독립문을 지나 올라오다보면 멋지게 생긴 한옥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건물이 바로 독립관입니다. 독립관은 옛 모화관 자리에 서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모화관은 어떤 곳일까요? 모화관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공식 접견장소였습니다. 중국의 사신 일행들이 도성에 도착하기 전에 홍제원에서 마지막으로 휴식을 취한 후 이튿날 무악재를 넘어 한성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이 사신들이 한성에 오자마자 처음 들르는 장소로, 임금은 이곳까지 나와 사신들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현재 현저동 101번지에 위치해 있던 모화관은 조선 건국 초기만 해도 지금보다 규모가 작았고, 처음에는 모화루라 불렸습니다. 모화루 앞에는 영은문(迎恩門)을 세우고 남쪽에 못을 파 연꽃을 심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모화루의 규모를 확장하고 모화관이라 이름을 바꿔 불렀습니다.왕은 이곳에서 사신들을 맞은 뒤에 경복궁이나 창덕궁에서 외교문서 전달식을 진행하고 먼 길 온 사신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독립협회가 사대주의의 상징인 이 모화관을 고쳐서 독립협회 사무실로 썼다고 합니다. 이 건물에는 독립관이라는 이름이 커다랗게 적혀있습니다. 그 글씨는 순종이 세자 시설에 쓴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원래 있던 건물이 불에 타서 1996년에 새로 지은 것입니다. 독립관에서는 자주독립·민족문화 선양·이권양여 반대·자유언론 신장·신교육 진흥·산업개발을 주제로 1898년 말까지 매주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또 자주·민권·자강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시민대중을 계몽하는 집회장으로 사용하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습니다. 독립관의 원래 위치는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3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으나, 현재 위치에 한식 목조건물로 복원하여 순국선열들의 위패(位牌) 봉안과 전시실로 사용 되고 있습니다.
5. 서재필동상
- 민족의 정신을 일깨워 주는 선각자
민족의 선각자 서재필 동상은 독립문 안쪽에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10년 동안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서재필 선생은 1895년 12월에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배재학당에서 목요강좌를 진행하면서 계몽활동도 병행하였습니다. 이상재(李商在)·윤치호(尹致昊)·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였고(1896. 7), 이를 중심으로 만민공동회도 개최되었습니다.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정신을 혁파하기 위해 모화관(慕華館)을 인수하고 개축하였습니다. 또 이를 독립관으로 바꾸고, 1897년 영은문(迎恩門)을 헐어 그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서재필선생은 외국인 신분이었으므로 앞으로 나서지 않고, 뒤에서 지도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수구파(守舊派) 정부와 러시아, 일본 측의 추방운동 영향으로 다시 미국으로 출국했습니다. 미국에서도 직간접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한 서재필선생은 광복을 맞은 후, 1947년 미군정장관 죤 하지(John R. Hodge)의 초청으로 귀국하셨습니다. 그리고 미군정청고문(美軍政廳顧問)으로 있는 동안 국민의 추앙을 받아 대통령 추대 연명을 받았으나, 국내 정치계와의 불화로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1948. 9) 여생을 마쳤습니다.
독립공원의 서재필동상은 영은문을 허물고 독립문을 세울 것을 발의했으며, 그 당시 고종과 귀족들 그리고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 독립문을 건립했습니다. 이 동상은 한민족의 독립을 주창했던 서재필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7. 3.1 독립선언기념탑
- 민족대표 33인의 거룩한 이름
3.1독립선언기념탑은 원래 3.1독립만세운동의 발원지인 탑골공원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1979년 공원 정비사업 때 철거되었습니다. 이에 각계에서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그 뜻을 살려 항일운동의 터전인 독립공원에 원상태로 복원하여 세웠습니다. 독립공원에 다시 세워진 그 날은 3.1운동 80주년 기념일로서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1999년 3월 1일입니다. 기념탑 기단 오석판에는 3·1독립선언서를 새겨 넣었는데, 전문에는 원문, 좌·우측에는 한글과 영문, 뒷면에는 기념탑 건립 취지문과 건립개요, 헌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높이는 19m 19cm이며 3·1운동이 일어났던 해인 1919년을 의미합니다. 3개의 기둥 축은 천·지·인과 천도교·기독교·불교 연합의 상징으로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듯하며 삼태극(우주)을 원구로 구성하였습니다. 원구 위에는 동서남북 4방위를 조형화한 민족웅비의 상을 올려놓았습니다.
- 탑 뒤에는 3·1독립선언문이 새겨져 있으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들의 이름이 판각되어 있습니다.
8. 순국선열 추념탑
- 민족자존을 지켜온 최초의 탑
추념탑은 순국선열을 추념하기 위해 세운 최초의 탑입니다. 뒤편에 새겨진 순국선열 추념탑기는 우리 민족문화의 선진성과 민족자존을 지켜온 유구한 역사성이 일제의 침략 앞에서 어떻게 독립의지로 나타났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순국선열추념탑기(殉國先烈追念塔記)
- '서대문독립공원'에 세워져 있는 '순국선열추념탑'은 선열들의 투쟁과 이곳 형무소를 비롯한 해외각처에서 고난당하고 순국하신 것을 추념하는 탑입니다.
순국선열을 추념하기 위해 세워진 최초의 탑으로, 폭40m에 걸쳐서 독립운동의 역정이 조각되어 있고, 중앙에는 22.3m높이로 새겨진 태극기상이 높게 솟아 있습니다. 높이 22.3m 길이 40m 폭 10.2m이며, 1991년 8월 15부터 1992년 8월 15일까지 제작기간은 1년입니다. 이 태극기 상은 좌우로 각각 4개식 8개의 부조가 새겨져 있고 민족자존과 불굴의 의지를 느끼게 합니다.
- 태극기상
또 좌측에 '항일의병 무장상'을 포함해서 4개의 부조, 우측에 '3.1 독립만세상'을 포함한 4개의 부조가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 '항일의병 무장상'
- '윤봉길, 이봉창 열사 상징상’
- '독립군 의병 순국선열 처형상’
- '유관순 열사 만세운동상‘
- '3.1 독립만세상’
- 안중근의사 이등박문 저격상
- 순국선열 의병 체포처형상
9. 독립의 물길
- 민족의 정체성 회복을 위해 역사성지로 재탄생 한 독립의 물길
역사 공원으로 새롭게 조성 했습니다. 정체성의 혼란을 주던 일본식 수경시설은 모두 없애고 사각형 모양의 우리나라 전통 연못 '방지'로 재현한 것입니다. 3.1독립선언 기념탑과 독립문 사이의 일본식 조경도 소나무 등 전통 수종으로 개량했습니다. 일본 색채가 배재된 진정한 역사적 성지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독립공원 측면에 조성된 물길은 마치 역사의 흐름을 상징화 해 과거와 미래의 시간 위로 물이 흐릅니다.
10. 독립과 민주 미래
- 대한민국이 미래로 가는 위대한 유산
독립과 민주의 성지 서대문, 이곳에서 대한민국의 독립과 민주의 미래가 출발합니다. 독립공원은 자유와 독립, 민주를 위해 목숨 바쳤던 선열들의 겨레정신을 느낄 수 있습니다. 김상근 목사님은, “우리가 일제에 항거하지 않았다면, 독재에 항거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없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대한민국 역사의 중요성을 상징하고 있는 독립공원은 현재와 미래의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해답을 제시합니다. 흔히 ‘지난 일을 잊지 않겠다는 것은 내일의 스승이 된다’, 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새로운 세대에게 역사라는 지식의 한계를 넘어 세상을 바르게 통찰하는 정신을 길러줘야 합니다. 숨어있는 역사의 교훈을 잊어버리면 그 역사는 다시 반복될 수 있습니다.
“서대문에는 민족의 자랑스러운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아픔과 상처와 불굴의 의지와 함성이 들려옵니다. 서대문구는 이를 기리기 위해 독립과 민주의 상징성을 문화 콘텐츠로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해마다 독립 민주 페스티벌이 열립니다. 다양한 장르로 고난의 역사를 축제화 하고, 시민들은 하나가 됩니다. 서대문구가 독립과 민주정신을 축제로 이끌어 낸 것입니다. 독립공원은 대한민국이 미래로 가는 가장 큰 유산입니다. 역사 경험과 다양한 문화자산, 독립 민주의 정신적 가치를 서대문이 갖고 있다는 의미는 소중합니다. 이제 서대문의 독립 민주의 상징성이 세계문화의 허브도시 문화로 거듭나야 합니다. 독립공원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밝히는 민족성지입니다.“
2013년 8월 15일 서대문독립공원에서, 서대문키다리아저씨 문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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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역사에 많은 관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