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독립민주페스티벌]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초석, 4.19혁명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 보는 텔레비전. 출근길 지하철 입구에 놓인 무가지.
인터넷 포털사이트 메인, 이동하며 듣는 라디오에서...
우리 주변에서 뉴스는 참 쉽게 찾고 들어볼 수 있습니다. 매일 매일 새로운 소식들이 우리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만들죠.
뉴스하면 떠오르는 소식의 종류는 무엇이 있을까요? 신문에도 경제면, 사회면, 연예면 등이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정치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될 겁니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식을 알리기 위한 대중 매체, 그리고 대중 매체에서 가장 중요히 다루는 정치라는 이슈. 왜 사람들은 정치를 중요하게 알릴까요? 우리는 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걸까요?
남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있는데 내가 어찌 편안히 있겠습니까.
내가 안 돌아오더라도 슬프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1960년 4월 19일. 위는 당시 한성여자중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던 진영숙이라는 어린 소녀가 어머니 앞에 남기고 간 유서입니다. 진영숙양은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4.19혁명 대열에 뛰어들었다가 총탄에 맞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어린 소녀는 무엇때문에 스스로의 목숨을 혁명에 바친 것일까요?
4.19혁명의 시작은 같은 해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선거에서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은 12년동안 지속된 자신의 장기집권체제를 연장하고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대규모로 부정행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나라를 대표할 사람은 국민이 직접 뽑아야한다는 가장 기본적이고 엄숙한 법을 깨고 자신의 독재만을 꾀한 것이죠.
전국적으로 유권자를 조작하고 사전 투표를 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후보가 등록할때 폭력적인 방해를 했고 비밀투표가 아닌 공개투표를 하는 등의 부정 행위를 자행해 압도적인 득표율로 이승만과 이기붕이 각각 정·부통령 당선이 되도록 손을 쓴 것입니다.
그러자 마산에서 이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국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진압하면서 경찰의 실탄 발포로 8명 이상이 사망하고 72명이 총상을 입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잔혹하고 말도 안되는 사건이지요.
그리고 4월 10일, 이 시위에 참가했다가 실종된 김주열이라는 남학생이 마산 앞바다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말이지요.
이것이 경찰의 소행으로 밝혀지자 국민들과 학생은 분노하게 됩니다. 국민을 속이고 기만하는 정권의 끝은 그렇게 찾아왔습니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의 4천여 학생들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해 봉화를 높이들자"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합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괴청년들의 습격을 받아 크게 부상당합니다.
이에 더욱 크게 분노한 전국의 시민들과 학생들은 더이상 참지 못합니다.
4월 19일, 이승만의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혁명이 일어납니다. 모두가 궐기한 것입니다.
이에 정권은 무력으로 맞섭니다. 국민의 뜻에 총과 칼을 들이댄, 이미 썩은 민주주의였던 것이죠.
이승만 정권은 데모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10만명의 국민에게, 심지어는 시위에 참여한 초등학생에게도 발포를 합니다. 수십명의 사망자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이승만은 사태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국민들은 계속해서 시위를 이어나갔습니다.
이 대통령은 하야하라.. 국군은 부모 형제에게 총을 들이대지 말라..
결국 26일 오전 11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했고 다음날 대통령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이어 4월 28일 이기붕 일가는 자살하였고 5월 29일 이승만은 극비리에 하와이로 망명합니다.
전 국민이 목숨을 바쳐 사수하고자 했던 민주주의. 공권력의 횡포에도 물러서지 않고 국민의 권리가 승리했다는 점에서 4.19혁명은 역사의 큰 의의를 가져다 줍니다.
국민의 지지와 믿음을 받지 못하는 정권은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독립과 민주의 역사를 뜻깊게 기릴 수 있는
2012년 서대문독립민주페스티벌!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