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에는 높이 88m, 86m, 104m의 능선인 104고지, 일명 연희고지가 있습니다.
휴전선 부근의 전방에나 있을 법한 산이름이
서울 한복판에 지여 붙여진 까닭이 무엇이었을까요?
연희고지는 바로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내려간 국군과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탈환을 위한 첫번째 진지로서
공산군이 주변 지형을 이용하여 오랫동안 견고하게 구축,
각종 무기로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수비하고 있던 이 고지를
한국해병 제1,2대대가 3일간 (1950.9.21~9.23) 악전고투 끝에 탈환하여
공산군의 서부 방어선을 돌파하여 서울탈환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당시 아군 178명을 잃고 공산군 1,750명이 사살된 격전지로써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1958년 9월 28일에 연희동 99에
높이 1.5m 돌에 해병대사령부에서 새겨 놓았으나
지금은 새로 단장하여 연희동 산104-10에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병대 104고지 전적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서울수복을 위한 최대의 격전지 104고지 이야기
1950년 6.25전쟁 당시 서울탈환을 위하여 양측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되었는데, 특히 이곳 백사고지혈투는 와우산 점령을 위한 치열한 공방전으로써 사실상 서부방어전이 성격이라기보다 서울수복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전장이 되었던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국제연합군중 미 제10군단은 그 예하에 미 제1해병 사단으로 하여금 서울수복의 주력부대로 삼고, 다시 그 예하에 제5해병연대와 한국 제1해병대대는 중앙진출로서 안산에서 노고산에 이르는 적의 주 저항선을 돌파하게 되었다. 적도 이곳에 2,500명의 최정예부대를 배치하였는데 우수한 장비를 갖춘 25여단이란 특수부대였다. 더구나 이 지역은 해방전 용산에 있던 일본군의 군지훈련장이었던 까닭에 자연 견고한 요새로 형성되어 버렸기 때문에 적은 이곳에서 최후 결전을 각오한 것이었다.
미 제5해병대는 1950년 9월 21일 오전 7시 드디어 기동공격을 감행하였다. 앞에는 완강한 적이 각종 화기를 20m마다 배치해서 기다리는 것은 예상도 못하면서, 미 제5해병연대 예하 미 제1대대는 노고산(105m)을, 미 제3대대는 안산(296m)을, 한국해병 제1대대는 중앙의 와우산 (105m)을 탈환하게 하였는데,한국 제1해병연대는 와우산 진출도중의 이곳 연희동 104고지와 안산지맥의 연희고지에서 처음부터 격전을 치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21일 오후 2시부터 104고지를 공격하여 치열한 백병전 끝에 2시간만에 점령했으며, 여기서 200m도 되지않는 연희고지 공격은 그 이튿날 오전 7시에 시작했는데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악전고투가 전개되어 종일 100m까지 밖에 전진하지 못했다.
미 제1해병대대와 제3해병대대는 전화력 집중으로 간신히 노고산과 안산을 점령했지만, 연희고지는 24일까지 2일간의 공격에도 300명의 병력손실만 있을 뿐 진전이 없자, 미 제5해병연대장 머레이(Murray)중령은 한국 제1해병대대와 예비대대인 미 제2해병대대를 투입시켜 공격에 가담시켰지만 고전을 거듭했다. F중대의 1개소대는 총원이 7명으로 격감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23일 종일공격이 헛되고 만것이 되자 미 제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Almond) 소장은 미 제1해병사단장 스미스(Smith)소장에게,정면공격 계획을 피하고 서울 동남쪽으로 우회포위하는 작전을 권유하게 되니, 사단장은 작전계획 수정을 반대하여 의견충돌까지 있게 되었다.
알몬드 군단장은 24시간까지 공격이 무망하면 해병대신 7사단육군을 서울공격에 참가시킨다는 결정이 있게 되므로써 해병의 명예가 좌우되게 되었으니 이만저만 중대사가 아니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미 제5해병연대장 머레이 중령은 비장한 각오로 24일 아침을 맞았다. 안개가 고지일대를 뒤덮어 시야를 가리는데다가 적은 포격과 항공지원을 예상하여 쉴새없이 연막탄을 터뜨리며 은폐시키고 있었다.
적이 위치한 연희고지는 높지는 않았으나, 경사가 급한 반사면에 구축된 적의 군지인 관계로 준비사격이나 공중지원도 별로 효과가 없는 채 미 제2해병대대와 제3해병대대가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적이 가까운 거리에서 쏘아대는 십자화로 접근시도가 좌절될 수 밖에 없을때, 전날밤에 고지하부 능선 참호속에서 밤을 세웠던 미 제2해병대대 D중대가 오전에 정상으로 돌격해서 207명중 178명을 잃고 드디어 이곳 연희고지를 점령했던 것이다.
이 연희고지야말로 아군의 판단으로는 전초기지일 것으로 판단했지만
실제로는 적의 서울 서부방어선의 핵심진지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던 것이다.
적은 이 전투에서 1,750명을 잃었으며 우리측은 이 연희고지를 발판으로
와우산을 점령하고 노고산 북쪽을 제압하는 서부방어선 돌파가 이루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