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구 현저동, 독립문 역을 지나다보면 붉은색 벽면에 약간 더 높이 솟아오른 망루가 보입니다. 대한제국 말기에 지어져 일제강점기 때의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광복 이후 정치적 격변과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의 고난과 아픔을 간직한 역사의 현장, 바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입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정문. TV에서 가끔 보셨죠? ^^
비 오는 날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영화의 한 장면 같아요.
독립운동을 막기 위해 세운 곳
일본제국이 본격적 침략을 감행하면서, 이에 저항하는 애국지사들을 투옥하기 위해 건축한 것이 서대문형무소입니다. 원래 이름은 경성감옥이었는데요. 일본인이 설계한 이 감옥은 560여평의 목조건물로 약 5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당시 전국의 감옥 총면적이 약 1,000제곱미터였는데 반해서, 새로 지은 감옥의 규모는 약 1,800 제곱미터로 거의 두 배에 가까운 것이었죠. 이 곳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악명 높은 곳이 되는데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잡아 넣었는지, 1912년에는 지금의 마포구 공덕동 자리에 감옥을 하나 더 짓고 그곳을 경성감옥이라고 부르게 되면, 마포의 경성감옥과 구별하기 위해 서대문의 경성감옥을 '서대문 감옥'이라고 부르게 되지요.
1919년 3.1운동이 발생하였을 때 수감자의 수가 폭증했는데, 민족대표였던 손병희,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관순 열사를 포함하여 무려 3,000명의 조선인을 한꺼번에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비좁은 곳에서 고통당했을지 상상이 됩니다.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을 고치게 되는데요. 광복 직전인 1944년에는 무려 2,890명이나 감옥에 갖혀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감옥과는 달리 18세 미만의 조선인 소녀들을 수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3․1운동 때 유관순 열사도 구금되어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하게 되었고, 잔혹한 고문도 많이 이뤄졌습니다.
유관순 열사,
얼굴이 통통해 보이는 것이 고문으로 인한 붓기때문이라고 하네요. ㅠㅠ
광복 후에는 시국사범들이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이 곳은 계속해서 감옥으로 쓰이게 되는데요. 그러면서 이름을 '서울형무소'로 바꿉니다. 처음에는 반민족행위자나 친일세력들이 대거 수용되었는데요. 곧 역사적인 풍랑 가운데서, 김원봉, 여운형 등 좌파 계열의 인사들이 체포되어 수감되게 됩니다. 한국전쟁 전, 후 1950년대에는 수감자의 70퍼센트가 좌파 인사들이었다고 합니다.
약산 김원봉 선생과 몽양 여운형 선생
1961년 12월 23일에 서울교도소로 개칭되었다가 1967년 7월 7일에 서울구치소로 바뀌는 기간 동안에는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등과 같은 정치적 변동에 따라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기도 합니다.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봉암과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도 이곳에서 사형을 당하였으며, 1975년 인혁당사건으로 사법살인을 당한 도예종 등 8명도 이곳에서 사형당하였지요. 1987년에 서울구치소가 의왕으로 옮겨질 때까지 형무소의 역할을 계속했답니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과 죽산 조봉암 선생
감옥에서, 공원이 되기까지
도시가 발달함에 따라 서울구치소가 도심에 있는 것이 부적합하다고 하여, 1987년 11월, 경기도 의왕시로 옮기게 됩니다. 당시 옥사(獄舍)는 모두 15개동이 있었으나 역사성과 보존 가치를 고려하여 제9ㆍ10ㆍ11ㆍ12ㆍ13옥사와 중앙사, 나병사(癩病舍)를 보존하기로 결정했답니다. 1988년에는 그 중에서 김구, 강우규, 유관순 등이 옥고를 치른 제10ㆍ11ㆍ12사의 감옥건물과 사형장이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1988년부터 공원조성공사를 시작하여, 1992년 8월 15일 제47주년 광복절을 맞아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습니다. 1995년에는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으로 망루와 시구문 등을 원형대로 복원하고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의 공사를 진행하는 등, 서대문독립공원 사적지에 대한 성역화사업에 착수했다. 1998년 11월 5일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개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네요.
한 때는 감옥이었던 곳인데, 이제는 아이들이 한가로이 등교하는 길이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