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을 잃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허수경 산문집, 오늘의 착각을 읽고
작년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허수경의 시 ‘수박’을 읽고 마음 깊은 곳에서 청량한 바람 한 줄기가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요. 한 편의 시가 주는 감동은 실로 컸습니다. (이 글의 마지막에서 수박 시를 소개할게요.)
이번에 읽은 책은 바로 허수경 시인의 『오늘의 착각』입니다. 1964년에 태어나 2018년,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한 작가의 유고산문집입니다. 그녀의 사망소식이 신문에 실리던 날, 그녀의 작품을 좋아하던 많은 사람들이 짧은 생을 살다간 작가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슬퍼했습니다.
착각! 살아가면서 착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찌 보면 착각하기에 조금은 여유롭게, 혹은 행복하게 순간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작가가 말기 암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나고 2년 후인 올해 6월, 그녀를 사랑했던 독자들에게 선물처럼 다가온 유고산문집에 실린 여러 편의 산문은 독특한 매력이 있습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어느 계간지에 연재한 글들을 한데 모은 것입니다.
시인이자 고고학자인 작가의 삶의 여러 단면을 엿볼 수 있었지요. 작가가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 등을 프리즘을 통해 보듯이 살펴보게 됩니다. 아픔을 겪은 사람만이 아픔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지요. 따뜻한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는 한 여인의 깊은 울림을 소중하게 품에 안아 봅니다. 책을 통하여 허수경 작가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을 내 자신의 생각에 비추어 보았습니다.
바닷가 마을의 외가를 추억하면서 써내려간 어린 시절의 추억은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향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가끔은 불현듯 바다가 보고 싶어질 때가 있지요. 미역냄새, 해풍, 화어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동화를 읽는 듯 했답니다. 화어와 더불어 그녀의 친구가 선물해준 물고기 모빌 이야기도 무지개처럼 꿈속을 헤매게 했지요.
독일에서 오랜 시간을 살았던 그녀의 젊은 날 이야기도 우리들에게 여러 생각을 하게 합니다. 우리나라의 제사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를 읽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서자였던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제사상을 두 번 받으셨다는 작가의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왜 그렇게 가슴이 아팠을까요.
여덟 편의 산문 중 일곱 번째 산문인 ‘착각의 저 너머’는 가장 마음에 드는 산문이었습니다. 절절한 생의 고독과 사람살이의 그 깊은 애절함과 상처받은 영혼에 대한 성찰을 많이 하게 하는 산문입니다.
우리가 ‘정신’의 영역에 속한다고 믿고 있는 많은 것은 어쩌면 우리 몸이라는 ‘물질’의 비균형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어쩌면 이런 생각도 착각의 산물이기도 하다. <착각의 저 너머 중>
여름이 물러가고 가을이 오면 가장 먼저 바람의 느낌이 다르게 다가오지요. 소슬한 가을바람을 벗 삼아 허수경의 『오늘의 착각』을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허수경의 시 ‘수박’을 소개하면서 오늘의 착각 이야기를 접습니다.
수박 / 허수경
아직도 둥근 것을 보면 아파요
둥근 적이 없었던 청춘이 문득 돌아오다 길 잃은 것처럼
그러나 아휴 둥글기도 해라
저 푸른 지구만 한 땅의 열매
저물어 가는 저녁이었어요
수박 한 통 사들고 돌아오는
그대도 내 눈동자,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었지요
태양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영원한 사랑
태양의 산만 한 친구 구름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울적한 사랑
태양의 우울한 그림자 비에게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혼자 떠난 피리 같은 사랑
땅을 안았지요
둥근 바람의 어깨가 가만히 왔지요
나, 수박 속에 든
저 수많은 별들을 모르던 시절
나는 당신의 그림자만이 좋았어요
저 푸른 시절의 손바닥이 저렇게 붉어서
검은 눈물 같은 사랑을 안고 있는 줄 알게 되어
이제는 당신의 저만치 가 있는 마음도 좋아요
내가 어떻게 보았을까요, 기적처럼 이제 곧
푸르게 차오르는 냇물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재와 붕장어의 시간이 온다는 걸
선잠과 어린 새벽의 손이 포플러처럼 흔들리는 시간이 온다는 걸
날아가는 어린 새가 수박빛 향기를 물고 가는 시간이 온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