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묻는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시월은 가을의 풍요로움과 넉넉함이 깊게 느껴지는 계절입니다. 높고 푸른 하늘과 상쾌한 바람 속에 서 있노라면 어딘가로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지요. 여행을 떠나는 대신 김영하의 산문집인 <여행의 이유>를 읽기로 했습니다. 소설집과 산문집을 많이 출간했으며 다양한 독자층이 있는 김영하 작가는 9가지 이야기로 책을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삶은 여행’이라는 표현을 많이 하지요. 작가는 참으로 많은 여행을 했습니다. 해외여행이 일반화되기 전부터(작가가 이십대 중반일 때부터) 여행을 다녔고, 여행에서 돌아오면 집필하여 책을 발간하고, 또 다시 여행을 떠납니다. 작가는 이야기 합니다. “여행이 내 인생이었고, 인생이 곧 여행이었다”고. 자신의 일상적인 흔적이 전혀 없는 여행지의 호텔에 묵으며 새롭게 발견하는 많은 것들(풍경과 사람, 이야기와 역사 등)과 만나는 즐거움에 매료됩니다. 집은 의무의 공간이지만 호텔은 집이 아니기에 의무가 없습니다. 일탈을 꿈꾸는데 가장 좋은 공간이겠지요. 풀리지 않는 숙제가 있을 때 맞서기보다는 가끔 달아나 보면 의외로 쉽게 풀리는 경험을 한 두 번씩을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여행은 지나간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우리를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 놓는다고 하지요.
문득 달아나고 싶을 때가 언제였고, 그런 마음이 들었을 때 어디로 달아난 적이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 보게 됩니다. 친구들에게도 물어 보았지요. 서너 명의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신혼 초에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고 하더군요. 다른 환경에서 긴 시간을 살다가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 생각의 차이에 직면하게 될 때 ‘아, 얼마간의 시간이라도 달아나고 싶었다’고 말입니다.
반나절의 짧은 여행이 좋은 해결방법이었다는 친구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 졌습니다. 거창하게 어딘가로 멀리 가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짧은 여행을 떠날 수 있을 때 때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겠지요.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에피소드는 여러 의미를 전달합니다. 낯선 나라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때로는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주고 가끔은 먹을 것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함께 숙박을 하게 되기도 하지요. 그렇게 여행지에서 받은 마음의 선물과 빚은 받은 사람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났을 때 갚는 것이 삶의 순리가 아닌가 합니다. 무한한 신뢰가 주는 기쁨을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
오디세우스 이야기는 인간 본연의 허영과 자만심이 자신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묻고 있습니다. 인정받고 싶어 하는 본능과 낯선 존재로부터 찬사를 듣고 싶어 하는 본능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봅니다. 여행자인 오디세우스를 위험에 빠뜨린 것은 그의 허영심이었고, 위험에서 벗어난 것은 스스로를 노바디(아무것도 아닌)로 낮춘 덕분이지요. 다시 한 번 오디세우스를 읽어봐야겠습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여섯 번의 전학을 했던 작가는 그때부터 여행을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요? 여행 중에 그는 ‘매 순간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제 가을이 깊어갑니다. 반나절의 일탈을 즐기기에 좋은 계절이 아닌가 합니다. 가을빛 짙어가는 고궁으로, 빈가지로 서 있는 나무들을 만나러 숲으로 가거나, 오래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불러내서 차 한잔의 여유를 나누는 시간을 가져보면서 가을을 행복하게 마무리 해 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조용히 물음표를 던져 보세요. ‘나에게 여행의 이유는 무엇인가’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