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를 움직인 대법원 10대 논쟁,
최초의 여성 대법관 김영란의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
독서는 어느 정도 자신의 취향대로 읽게 된다는 생각이다. 인문서적, 사회과학서적, 종교서적, 소설, 에세이, 평론 등 여러 분야의 책들을 두루 읽기란 쉽지 않다. 한 쪽으로 치우친 책읽기가 되지 않도록 나름대로 독서 계획을 세우는 것이 보다 깊은 사고를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평소에 잘 읽지 않았던 법룰에 관한 책을 읽어 보고 싶어서 2004년, 우리나라 사법사상 최초로 여성 대법관을 지낸 김영란의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를 읽었다.
여러 차례 뉴스에서 보도한 김영란 법(2011년 부터 2012년까지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우리 사회 정의에 큰 영향을 미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던 터라 김영란의 책을 선택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대법관으로 6년간 재직하면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배려하고 국민의 기본권 보호를 위해 노력한 삶에 경외심이 든다. 이 책은 한국사회를 움직인 대법원의 10대 논쟁을 예로 들어 한 사건마다 그 판결을 되짚어가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열 개의 사건을 하나씩 조명하면서 판결이 나기까지 원고와 피고간의 법적인 투쟁과 긴 기다림의 시간도 이야기 하고 있다.
1. 존엄하게 죽을 권리 VS 생명을 보호할 권리 (김 할머니 사건)
2. 주식회사는 누구의 것인가 (삼성 사건)
3.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인가 (포털사이트 명예훼손 사건)
4. 종교의 자유는 어디까지 보장되는가 (양심적 병역거부와 k군 사건)
5. 교육의 공공성 VS 사립학교의 자율성 (상지대 사건)
6. 성소수자의기본권 VS 사회 통념의 한계 (성전환자 성별정정 사건)
7. 변화하는 전통과 장남의 권한 (호주제 폐지 이후의 관습법)
8. 환경의 가치 VS 대규모 국책사업의 가치 (새만금, 천성산, 4대강)
9. 출퇴근, 업무의 연장인가 아닌가 (출퇴근 재해에 대한 사회적 합의)
10. 퇴직금은 무엇을 보장해야 하는가 (퇴직금 분할지급 사건)
위에 나열한 열 가지의 판결을 다시 생각하면서 쓴 글은 우리들에게 생소한 대리 경험을 하게 한다. 신문이나 뉴스를 통한 사례를 알고 있을 뿐이었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법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도 새삼 느끼면서 말이다.
열 가지 사례 중 특히 3장에서 다룬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인가' -포털사이트 명예훼손 사건-은 요즘 sns등에 올려진 수많은 글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할 수 있는지, 그 사실을 말하고 있다.
제대로 확인 조차 하지 않고 마음대로 글을 올리는 일부 사람들 때문에 알게 모르게 마음의 상처를 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 걷잡을 수 없는 문명의 발달 속에서 우리는 가끔 길을 잃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이럴 때 일수록 심도 있는 생각과 사고가 필요하지 않을까.
8장에서 다룬 새만금, 천성산, 4대강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도 꾸준히 회자되고 있다. 우리의 삶의 터전인 자연환경을 어떻게 보존하고 또한 어떻게 개발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것은 각자의 입장에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게 된다. 모두를 위하는 길이 어떤 것인가를 심도있게 그리고 먼 앞날을 내다보면서 결정하여야 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말과 함께 머릿속에 떠오른다. 폭넓은 독서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본다.
** 책 속에 나오는 글 중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구절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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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 <존엄하게 죽을 권리 VS 생명을 보호할 의무>중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어떻게 지켜야 할지 각자가 고민하지 않는다면 개인들은 점점 더 무력해질지도 모른다.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절대적인 명제에도 불구하고 자기결정권 존중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가는 이면에는 이런 불안감이 숨어 있다. 어쩌면 김 할머니 사건의 유일한 교훈은 개개인이 자신의 생명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미리 분명하게 의사표시를 해두어야 한다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나머지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가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았다.
* 3장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인가> 중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인터넷 게시물에 대해 일차적인 책임을 지는 걳은 물론 해당 게시물을 직접 게시한 측이다. 포털사이트가 제공한 인터넷 공간에 게시된 명예를 훼손하는 게시물을 인터넷 이용자들이 포털사이트의 검색기능을 통해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바로포털사이트에 명예훼손 게시물에 대한 불법행위 책임을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 6장 <성소수자의 기본권 VS 사회 통념의 한계> 중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이 집필한 다수의견에서 내가 특히 공감한 부분은 "불의의 본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에 그것이 우리의 눈에 바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에 있다." "권리란 고래(古來)의 원천에서만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권리는 지금 시대에 시급한 상태로 방치된 자유를 헌법적 명령이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대한 더 나은 정보와 이해로부터도 도출된다"라는 구절이다.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우리나라의 성적 소수자에 대한 헌법적 문제를 따질 때 이 구절들을 떠올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 9장 <출퇴근, 업무의 연장인가 아닌가> 중
출퇴근 재해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는 문제는 결국 사회권적 기본권을 어디까지 보장할 것인가, 다시 말해 예산의 우선순위를 정해둔 행정부의 계획에 따를 것인가. 헌법정신을 우선시할 것인가의 문제와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무상'복지냐 '선별'복지냐 하는 논쟁의 바탕에 깔려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