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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시집] 시와 에세이의 어우러짐, 문정희 시인의 ‘살아 있다는 것은’

서대문블로그시민기자단 2015. 9. 24. 10:13
[가을 시집] 시와 에세이의 어우러짐, 문정희 시인의 '살아 있다는 것은'

 

 가을에 책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다. 소슬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맑고 푸른 하늘, 지천으로 피어나는 가을들꽃과 서서히 단풍들어가는 나뭇잎들을 보면서 우리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번에 읽은 책은 문정희 시인의 시와 에세이가 있는 <살아 있다는 것은>이다. 한 권의 책 속에 마흔네 편의 시와 에세이가 실려 있다. 한 편의 시에 한 편의 에세이가 더해진 구성이기에 장르를 넘나들며 책 읽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부딪치는 수많은 일들과 지난날의 아프고 슬픈 기억, 때로는 불붙듯 사랑했던 순간들, 가족과 친구 이야기 등이 실타래가 술술 풀어지듯 이어졌다.  

 시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살이의 여러 무늬들이 다채롭게 수놓아져서 때로는 한 편의 그림을 보는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문정희 시인의 시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서정적이고 예리한 눈으로 바라보며 쓴 시이기에 독자들의 가슴을 울리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는 것이리라. 

 <살아 있다는 것은>은 읽으면서 종종 내 마음 속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옛 추억이 생각나서 한참을 눈 감고 있기도 했다. 사랑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각자가 지닌 사랑의 추억을 떠올릴 것이다. 젊은 시절 한 때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 사랑이 아름다운 결실로 이어진 사람도 있을 것이며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시시때때로 아파하며 오랜 시간을 지낸 사람도 있으리라.
 
 시인은 이야기 한다. “오직, 순간만이 나의 전부이며 순간을 놓치는 것은 영원을 놓치는 것이다.”라고.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우리가 가슴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이며 여기’라는 말이 있다. 오로지 ‘오늘 이 순간’이 중요한 것!

 이 책은 특히 중년여성에게 많은 공감을 얻을 것이라 생각한다. 젊은 시간을 보내고 중년의 문턱에 서서 지난날을 돌아보며 자신과 비슷한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지그시 눈 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떠 올리리라. 연애, 사랑, 실연의 아픔을 이제는 멀리서 바라볼 수 있으리.

 

 마흔네 편의 시 중에서 마음에 스며든 시 세 편과 에세이 중의 일부를 소개한다.

남편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네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알몸 노래
- 나의 육체의 꿈

                             문정희

추운 겨울 날에도
식지 않고 잘 도는 내 피만큼만
내가 따뜻한 사람이었으면
내 살만큼만 내가 부드러운 사람이었으면
내 뼈만큼만 내가 곧고 단단한 사람이었으면
그러면 이제 아름다운 어른으로
저 살아 있는 대지에다 겸허히 돌려드릴텐데
돌려드리기 전 한 번만 꿈에도 그리운
네 피와 살과 뼈와 만나서
지지지 온 땅이 으스러지는
필생의 사랑을 하고 말 텐데

 

늙은 꽃

                             문정희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꽃의 생애는 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아는 종족의 자존심으로
꽃은 어떤 색으로 피든
필 때 다 써 버린다
황홀한 이 규칙을 어긴 꽃은 아직 한 송이도 없다
피 속에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는
꽃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오묘하다
분별 대신
향기라니

 

나는 다시 시작하리라. 그러나 이제는 방황이나 우왕좌왕보다는 나의 열정을 진실로 내가 원하는 곳을 향해 쏟으리라. 유목민은 길을 떠날 때 적당히 배고픔을 달랠 물이나 음식물 따위를 준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대신 배가 고플 때에 허기진 배를 꽁꽁 동여맬 가죽 허리띠 하나를 준비해서 길을 떠난다고 한다. 비장함 없이는 길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옛 성현이 아니더라도 삼십은 뜻을 세우는 나이다. 그리고 세운 뜻을 향해 천천히 대장정을 떠나는 나이다. 가슴 속에 튼튼하고 질긴 나만의 가죽 허리띠 하나를 품고...

          - 나를 찾아 세상 밖으로 中에서-

 

 자식이 홀로 독립하여 떠나는 것은 부모에 대한 보은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합일의 정열만을 내세우고, 그것만을 집착하는 모성애는 본능적인 모성애일 뿐이다. 분리의 정열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미흡한 모성애일 뿐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죽은 나무에 꽃도 피우게 하는 것이 모성애라 하지만, 끝없이 스스로를 통제하고 끝없이 아프게 이룩해내지 못하면 오히려 불결해지는 것이 또한 모성애인 것이다.
 새삼, 세상 어딘가에 항상 문 열어 놓고 기다리고 계실 따뜻한 모성이 어딘가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행복하게 느껴진다.

             - 상실을 목표로 하는 어머니의 사랑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