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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의 의미! 근대 자주적 민족의 긍지를 세운 독립문!

서대문블로그시민기자단 2017. 3. 24. 10:41

독립문의 의미! 근대 자주적 민족의 긍지를 세운 독립문!

 

 

 

 

요즘 사드배치 문제로 중국의 보복이 다방면으로 거세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지 「독립문」에 대한 생각이 더 자주나곤 했습니다. 과거 중국 중심의 질서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하자는 상징이었던 '독립문'을 TONG지기가 찾았습니다.

 

 

 독립문의 의미

조선시대 청나라의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모화관이 세워졌고, 그 옆에 영은문이 있었어요.

사적 제 33호인 영은문은 독립문이 세워지기 전에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문이었지요.

1897년 청나라로부터 자주적 독립을 하기 위해서 높이 15m, 면적 2,640 사적 32호 독립문을 세우고 예전자리에는 독립문지라는 표지판을 묻어 두었습니다.

 

모화관과 영은문을 허물고 지어진 독립문은 1897년 혼란스러운 국제정세 속에서 청나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와 염원을 담고 국민모금행사를 통해 모인 기금으로 독립협회가 세운 건물입니다.

 

 

3월 11일 따뜻한 오후, 독립공원에 많은 사람들이 나왔네요.

 

▲ 안산 자락길 걷고 내려온 시민

 

▲ 서대문에서 무악재 방향 독립문

 

독립문은 1890년 말 청나라의 간섭이 많았던 때 그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독립협회가 국민들의 성원에 만들어진 것이에요. 독립협회를 조직한 사람은 송재 서재필입니다.

 

▲ 무악재에서 서대문 방향으로 본 독립문

 

송재 서재필은 김옥균, 박영효와 함께 갑신정변 때 개화파의 일원으로 활동을 했지만, 실패 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을 했어요. 그곳에서 생활을 하다가 박영효의 권유로 다시 고국으로 와서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공원을 조성하는데 앞장섰지요. 하지만 수구파의 반대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어요.

 

1880년대 말은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이며,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서양문물이 들어오고 있었어요. 하지만 조선은 쇄국정책을 벗어나 문호를 개방했지만 자주적인 것보다는 외세의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졌지요.

 

1894년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일 전쟁을 조선에서 치루 게 되었고, 그 후 일본이 승리하게 되었지요.독립협회는 조국의 근대화를 청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그 중심사상을 삼아 활동을 했대요. 국민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참여하여 독립문을 세워 근대화의 상징적 의미는 컸지만, 이완용 등 친일파 회원들이 협회 들어오면서 문제도 생겼지요. 바로 독립문 글씨를 이완용이 썼다고 하네요.

 

이제 새로운 독립문을 국민들의 가슴 속에 하나씩 만들 때이지요.

 

▲ 무악재에서 서대문 방향으로 본 독립문

 

 

 독립문과 사바틴

독립문은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고종의 동의를 얻어 프랑스의 에투알개선문을 본뜬 모습이지요. 자주 민권(국가의 부강은 민권과 개인의 부강을 구성하는 요건)과 자강 운동(애국계몽운동으로 실력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을 도모하는 운동)을 대표하는 기념물이기도 하지요.

 

주초들은 긴 사각기둥 모양으로 꼭대기에 기둥을 고정시켰던 홈이 있는 것이 특징이지요. 주초의 하나는 사대외교의 표상을 뜻하며, 다른 하나는 독립 자강의 상징을 나타내요.

선두로 스위스계 우크라이나인 세레닌 사바틴은 독립문의 세부 설계도를 만든 건축 기사이지만 실제 건축을 한 사람은 조선인으로 알려져 있지요.

 

독립문은 화강암으로 세워졌으며, 외부 구조는 중앙에 홍예문이 있고, 내부에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돌층계가 있는 것이 특징이지요. 독립문은 1979년 고가도로 건설로 도로 한복판에 있던 것이 독립공원으로 옮겨졌어요. 아치형으로 만든 독립문은 압력을 분산하려는 것도 있어요. 개화기 이후 1897년 11월 20일에 세워진 독립문이지요.

 

TONG 지기와 함께 독립문의 현장을 가볼까요?

 

 

▲ 독립문 구조를 보면서 설명을 하고 있는 홍균화 향토사학자!

 

▲ 고향을 찾아서 역사를 찾아서 경성고등학교 동기생

 

 

서초구에 살고 있는 이주열 씨는"과거의 역사를 돌아보자!라며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광화문에서부터 독립문까지 역사 걷기를 하며 왔어요. 우리나라가 구한말 어려웠던 시기에 자주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독립문을 세웠다고 하는데, 현재도 우리나라는 경제력도 있으니,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 독립정신을 보여야 할 때입니다."라며 당부를 하네요.

 

그들은 젊었을 때 함께 다녔던 연희동 경성고등학교 70년대 동기생으로 모교가 있었던 서대문구에 오니 무척이나 기쁘다고 해요.

 

 

▲ 안산 하이킹(hiking)을 하고 내려오는  Meetup 회원(중간 오현환 씨 우측 네덜란드인)

 

 

"서대문에는 안산, 백련산, 인왕산, 북한산 등 하이킹을 다녔어요. 정말 좋은 곳이지요. 그러나 독립공원에 독립문을 보면 남다릅니다. 우리나라가 그때는 조공 국가로 있었지만 독립국으로 살아가려고 했어요. 지금도 중국에 더 당당하고 중국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베트남처럼 당당할 필요가 있어요.

 

우리나라가 사대 강국에 둘러싸여 있어서 일본한테도 두 번을 당했지만, 외부 요인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지요. 우린 그들의 피를 헛되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라며 오현환 씨가 전했어요.

 

그들은 여러 나라에서 온 회윈들과 함께 한국에 하이킹을 다니고 있다고 해요.

 

 

▲ 일본에서 여행을 온 구로위와 사마미쯔

 

 

지난 3월 11일 독립공원에서 과거 일본에서 함께 일한 회사 직원을 만나기 위해 오셨다는 구로위와 마사미쯔 씨를 만나 보았어요.

 

"과거 전쟁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지금 돌아보면 한국인들에게 너무나 죄송합니다. 현재 한국은 탄핵으로 대통령이 물러났지만 국민들이 힘을 내서 경제적으로 살아났으면 합니다."라며 말했어요.

 

▲ 국민의 마음이 담긴 독립문의 모습

 

▲ 독립문과 일출

 

 

독립공원에는 3·1절을 기념하는 탑과 의병, 독립군, 광복군으로 이어 무장투쟁한 선열들의 추념탑도 있어요.

 

 

▲ 서대문독립공원 안에 위치한 현충사

 

 

 

▲ 3·1 독립 선언 기념탑

 

▲ 순국선열추념탑

 

▲ 송재 서재필 동상

 

▲ 넓은 독립공원

 

▲ 독립문 야경

 

독립문과 독립관은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 내려 4번 출구로 나오면 되지요.

 

독립관은 사대주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모화관의 명칭을 고쳐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독립관으로 명명하고, 그 건물을 독립협회 회관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순국선열들의 위패 봉안과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어요.

 

독립문의 그 정신을 우리가 계승하고,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여러 나라의 관계에서 한반도의 문제도 우리 스스로 지켜나가야 해요. 독립운동가의 그 뜨거운 독립의 정신을 고취시켜 자주적인 민족적 의지를 가져야 할 때라고 봅니다.  

 

<사진, 글 : 블로그 구민기자 장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