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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 역사이야기]명량대첩 완전정복!<신에게는 아직 열두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

서대문TONG 2014. 9. 12. 09:57

[역사 속 영화이야기] 

명량대첩 완전정복!

"신에게는 아직 열두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


안녕하세요~ TONG지기랍니다!!! 

추석은 잘보내셨나요? TONG지기도 여러분 덕분에 잘 보냈답니다^^

이번에 소개시켜드릴 내용은 바로 역사 속 영화이야기 "명량대첩"입니다.


영화 "명량" 관객수가 개봉 36일만에 1700만명을 돌파했다고 하지요?? 

음~ 그러니까 남한인구가 5000만이라고 하면 5사람중 2명은 봤다는 이야기가 되네요.. 

우와~ 우리 TONG 블로그도 어서 그렇게 되야할텐데ㅜㅜ


 



국의 역사에 빼놓을 수 없으신분 바로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 시절 너무나도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일본의

해군을 무찌른 위인이시죠~

 


영화 명량은 1957년 정유재란, 오랜 전쟁으로 혼란이 극에 달한 조선에 무서운 속도로 한양으로 북상하는 왜군에 의해 국가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누명을 쓰고 파면 당했던 이순신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었지만 남은건 전의를 상실한 병사와 두려움에 가득 찬 백성, 그리고 12척의 배로 승리하는 내용의 영화이지요?

명량을 시작으로 이순신 장군의 3대 대첩 한산도대첩, 명량해전,노량해전을 시리즈로 만들 예정이라고 하네요

 

여기서 잠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아시나요?


1592년(선조 25년)에서 1598년(선조 31년)까지 2차에 걸쳐 왜군이 우리 나라에 쳐들어온 전쟁으로 임진년에 일어났다 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하며, 정유년인 1597년 제2차 침략전쟁을 따로 정유재란이라고도 하는데 임진년 침입후 재침한 정유년까지 합하여 통상 임진왜란이라 부릅니다.그것은 임진년 초기 침략하여 계속된 전쟁이기에 그렇게 불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순신 장군의 활약을 그린 영화 명량!! 그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러 함께 가실까요?

 


 




1905년, 당시의 일본의 상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총으로 100여년 동안 전국시대라고 불리우는 서로 나뉘어진 국가를 통일하게 됩니다. 전국시대란~ 음~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떠 올리시면 쉽게 이해하시겠죠??^^

일본의 통일은 무력으로 통일한 상황인지라 사람들은 불만이 많고 배신감과 자신이 속해 있던 나라를 잃어버림에 비탄에 빠져 있었겠지요? 

그래서 내부적인 결속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한국은 문인의 국가, 일본은 무사의 국가라고 흔히들 불리우는데요, 통일을 하게되면서 무사가 하는 일이 사라지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이들의 에너지를 표출할 수 있는 분출구를 마련해 주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의 조선에 전쟁을 해야겠다하고 침공을 하게된 것입니다.

바로 임진왜란의 시작, 부산포로 쳐들어 온 것이지요..

 

 



 

이들의 생각은 한양까지 재빠르게 치고 올라가, 선조를 인질로 잡아, 군량미와 병력을 확보하고, 중국(당시의 명나라)을 침공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선조가 수도를 버리고 의주로 가버리게 됩니다.

당황한 일본인은 한양과 평양에서 시간을 버리고 있었는데, 전열을 다듬게 되는 시간을 벌어주게 됩니다.

이 시간이 이순신 장군님에게 골든타임이 되었답니다.

수륙을 통해서 보급품을 전달하는 항로를 이순신 장군이 족족 끊어버렸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군은 배고프고, 무기가 없게 되자 힘이 빠지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일본은 2년 만에 철수하게 되니, 이것이 임진왜란이 되었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휴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휴전이 결렬되고 나서 1597년 정유년에 재차 왜인들이 난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정유재란의 시작이 되었답니다..

 


 


(출처 : 영화 명량 공식 홈페이지)


이순신 장군님전투스타일은 우세한 병력으로 기습하는 형태였습니다. 하지만 명량해전은 12척으로 330여척의 적선을 맞이해서 싸운 전투입니다. 

 

12척의 배로 어떻게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까요?? 바로 이순신 장군의 전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랍니다.

명량해전 전술, 울둘목(명량해협)은 수심이 얕아서 배가 항해할 수 있는 범위가 좁고, 그 중에서 밀물 때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밀려와서 서해로 빠져 나가면서 해안의 양쪽 바닷가와 급경사를 이뤄 물이 쏟아지듯 빠른 조류가 흐른다고 합니다.

또한 크고 작은 암초가 많아서 급조류로 흐르던 물살이 암초에 부딪쳐 방향을 잡지 못하고 소용돌이가 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을 이용한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전략의 승리라 할 수 있겠죠??^^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


 

첫번째로 엄청난 이순신 장군의 세력이 선조를 압박했었다고 합니다. 

이순신장군이 수군 통제사로 있는 3도가 안전하다고 하여 백성들이 몰려들게 됩니다.

그러자 선조는 굉장히 예민하고, 의심 많고 시기심도 많은 사람이었는데, 거기다가 임진왜란 당시 수도를 버리고 의주로 도망간 낙인이 찍혀있었지요. 그런 상황에 이순신 장군이 왕처럼 군림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지요,

밖에서는 왜가 적이라면, 내부에는 이순신이란 적이 크고 있다고 생각하고 선조를 압박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또한 선조의 아들 광해가 의병을 진두지휘하는데, 이순신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무과를 치룰테니, 장군은 병사들과 함꼐 나에게로 오시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지금은 전시상황으로 제가 갈 수 없으니, 이곳에서 제가 무과시험을 치루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답했답니다. 이에 선조와 광해군은 위협으로 다가온 것이지요~

 

그 때 정유재란의 첩보가 들어와서 선조는 이순신 장군에게 함선을 이끌고 나가라고 명했지요~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적의 첩보를 믿을 수 없다면서 거부를 합니다. 그런데 진짜로 왜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노한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고문하고 옥에 가두시면서 백의종군 당하게 되신 것입니다.

 


 




새롭게 3도수군 통제사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원균 장군이었습니다.

임금의 명을 거역 할 수 없었던 원균장군은 출정을 하게 되었는데 부산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하게 되지요.ㅜㅜ

선조는 생각을 달리 하고 수군이 강하다기 보다 이순신 장군의 지도력 뛰어났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순신장군에게 편지를 보내 나라를 위해 싸워달라고 하게됩니다.

이것이 영화 명량해전의 전까지 역사이야기랍니다.

 


 

TONG 여러분 재미있으셨나요? 역사이야기라 재미없으셨다고요?ㅜㅜ 

그래도 몰랐던 역사이야기를 알게 되졌으면 TONG지기는 보람을 느낀답니다. 

서대문도 이러한 임진왜란에 마음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요, 임진왜란때 돈의문이 불에 탔었으나 숙종 37년인 1711년 재건되었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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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명량이라는 영화속의 이야기에 연관된 


우리 주변에 있는 문화재를 한번 둘러보는 날이 되셨으면 합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 역사와 문화재가 있는 문화생활 함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