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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해요 서대문 2179

서대문의 역사 - 60년대 후반 하천과 주거생활

60년대 후반 한국은 베이비붐세대를 사회전반적인 영역에서 모두 감당할 수 없었고 국민들이 생활 할 수 있는 주거공간을 마련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시급했습니다. 1966년 6월 29일 홍제동 판자집- 현재 홍제동 한양아파트 쪽에서 무악재쪽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오늘날의 모습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죠 정말 금석지감입니다. ^^ 1966년 7월 29일 자문밖 홍제천상류- 이 시대엔 하천이 정말 깨끗했죠! 하천 밑에서 바지걷어붙이고 뛰노는 아이들이 보이시나요? ^^ 1967년 10월 7일 홍제동 양성화지구- 현재 홍제4동 지역인 서대문구 세무소뒤편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문화촌 현대아파트 일대로, 오른쪽에 보이는 봉우리가 인왕산의 주봉이라고 해요. 1969년 3월 26일 금화아파트전경- 서울최초의 시민아파트 금화..

연말 후회없이 뜻깊게 마무리하는 법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것 같은 정갈한 마음으로 새 다짐과 포부를 가졌던 새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해의 마지막인12월이 되었어요. 다가오는 새해가 반갑지만은 않은 것은 아직2010년에 미련이 많이 남기 때문일 테죠 ㅠㅠ 한 해를 열심히 보낸 것 같지만 왠지 모를 후회가 남는다면 지난 일을 잘 마무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 12월의 첫 포스팅, ‘2010 한 해 후회 없이 마무리하는 법’을 정리해봤어요! 1. 지인에게 마음을 전하기 한 해 동안 함께한 소중한 지인에게 마음을 전해봐요. ^^ 지인이 좋아하는 밥 한끼 대접하는건 어떨까요? 물론 다함께 어울려 노는 송년회 자리도 좋지만, 마주 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그간 고마웠던 일들에 감사를 전하는 것 만큼 따뜻한 자리도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서대문의 역사 - 60년대 사람들의 정겨운 모습

젊은세대에게는 그저 먼 옛날로만 느껴지지만 그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의 향수 불러일으키는 60년대 이야기^^ 그치만 이 사진들을 본다면 젊은세대도 왠지모를 정겨움을 느끼게 될거같아요. 1963년 5월 31일 이화여대 메이퀸 선발행사 -이화여대에서는 매년 5월 '메이퀸대회'를 열었습니다. 처음에는 교수 중에서 5월의 여왕을 선발하다가, 그 뒤 재학생 중에서 재색을 갖춘 메이퀸을 선발하여 장안의 화제가 되었었는데요^^! 중앙에 곱게 차려입고 당당하게 서 계신 여성분이 63년의 메이퀸인거같죠? 1963년 9월 6일 수도안내차 접수광경- 당시 깨끗한 물이 부족하고 환경이 매우 건조했기때문에 물의 중요성이 컸답니다. 수도 안내차가 나와 주민들에게 접수를 받는 광경이에요 ^^ 이웃분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고 무지 정..

서대문의 역사 - 60년대 도로와 하천 개발

60년대 초 서대문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이곳저곳 파헤쳐진 마을을 재정비하는 데 힘썼습니다. 주민들이 밀집해있는 지역의 도로를 확장 공사하고, 하천도 공사했죠. 1958년 8월 1일 영천일대 - 현재 극동아파트 건너편 삼호아파트 언덕에서 서울역쪽(남쪽)을 보고 찍은 사진입니다. 한 가운데 뾰족하게 멀리 보이는 산이 관악산이구요^^ 60년대 초반 서대문 도로와 하천 개발 공사 1962년 6월 15일 사천교 가설 공사 기공식 - 60년대 서울의 팽창으로 모래내 지역도 발전을 이뤘고 사진은 도로와 함께 6.25 때 없어진 다리를 새로 확장하기 위한 기공식 장면입니다. 그리고 전면에 보이는 철교가 바로 경의선이랍니다 ~! 1962년 11월 1일 사천교 - 62년 당시 개통된 사천교는 남,북가좌동의 개발을 가져왔습..

서대문의 역사 - 60년대 초의 생활모습

60년대초 한국은 전쟁의 참혹한 그늘에서 겨우 벗어났지만, 베이비붐으로 인해 급증한 인구에 비해 도시의 발전은 상당히 더뎠습니다. 이 때문에 이곳저곳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이 허다했죠. 나라에서 지원해주는 식량이 아니면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한 가구도 많았습니다. 의식주 모두를 제대로 영위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60's 주민 기초 생활 지원 1961년 5월 26일 수색 정착민에게 식량 전달 - 식생활 지원 1961년 5월 26일 응암동 부락민 수용 - 주거생활 지원 1961년 11월 3일 신촌 보조수원지 낙성식 - 부족한 물을 공급하기 위한 보조수원지 1962년 5월 29일 홍제동 급수배관 및 못자리 소방차 동원 - 60년대 서울 변두리의 상수도 사정이 좋지 않아 여름철에는 살수차로 주민들에게 물..

다문화가정이 우리 사회에서 겪는 문제와 해결책!

다문화가정이 우리 사회에 겪는 문제와 해결책! 최근 우리사회는 가파르게 증가한 다문화가정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있습니다. 다문화 가정은 서로 다른 국적과 인종, 문화를 가진 남녀가 이룬 가정을 의미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다문화가정은 16만 가구에 달하며, 이들의 자녀수는 5만 8천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정도면 우리나라는 이미 다문화, 다인종 사회가 된것이죠. 하지만 여전히 오랜 관습때문에 한핏줄만이 한민족이라는 인식이 팽배합니다. 다문화 가정을 대상으로 ‘자녀교육 적응도’를 묻는 한 조사에서 ‘잘 적응하고 있다’는 응답이 불과 47.6%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문화가정 자녀들이 계속해서 증가하는 추세에 이런 분위기가 지속된다면 분명 큰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우려가 있습니다. 오늘은 현재 우리나라..

서대문의 역사 - 연희동 104고지(연희고지) 이야기

서대문에는 높이 88m, 86m, 104m의 능선인 104고지, 일명 연희고지가 있습니다. 휴전선 부근의 전방에나 있을 법한 산이름이 서울 한복판에 지여 붙여진 까닭이 무엇이었을까요? 연희고지는 바로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내려간 국군과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탈환을 위한 첫번째 진지로서 공산군이 주변 지형을 이용하여 오랫동안 견고하게 구축, 각종 무기로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수비하고 있던 이 고지를 한국해병 제1,2대대가 3일간 (1950.9.21~9.23) 악전고투 끝에 탈환하여 공산군의 서부 방어선을 돌파하여 서울탈환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당시 아군 178명을 잃고 공산군 1,750명이 사살된 격전지로써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1958년 9월 28일에 연희동 99에 높이 1.5m..

서대문의 역사 - 서대문과 이괄의 난

서대문이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 이괄의 난 이괄은 인조반정때 광해군을 페하고 인조를 왕위에 오르게 하는데 큰 공은 세운 인물이었지만 왕위에 오른 인조는 이괄이 군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일등공신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이 즈음 중국에서는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원조하기 위하여 막대한 군비를 들였기 때문에 나라가 점차 쇠퇴하고 정변이 일어나 청나라가 만주땅을 근거지로 하여 세력을 점차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이에 우리 조정에서는 북쪽 국경지대의 방비가 급하게 되었으므로 인조는 이괄을 국경 방비를 담당토록 하였습니다. 마음속으로 이전의 대우에 대해 불만을 품어왔던 이괄은 중대한 임무를 맡게되자 섭섭한 정을 풀고 평안도로 향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은 이괄은 부원수에 임명되었고 자기보다도 능력이 떨어진다고 생..

서대문의 역사 - 무악재호랑이를 아시나요?

주로 경기도 고양군에 사는 나무장수들이 넘어 다녔던 무악재는 지금으로부터 80여년 전만 해도 혼자 넘어다니지 못했던 무서운 고개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개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이 물려가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동물원에서만 볼 수 있던 호랑이가 있었다는게 믿어지시나요?!) 어쨌든 호랑이 때문에 옛 서대문형무소가 자리잡고 있던 곳에 유인막이라는 막사가 있어 행인을 일단 그곳에 모았다가 열 명에 이르면 넘어가게 했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면 군인들에게 장교는 승진하고, 하사관은 면포 20필을 받고, 천인에게는 부역 면제를 받는 등의 특혜가 주어졌다고 하니 그 당시 얼마나 호랑이의 피해가 많았는지 짐작 할 수 있겠죠^^?! 그러던 어느날 조정에서는 이곳의 호랑이의 피해가 심하자 호랑이를 없..

서대문의 역사 - 서대문 지명의 유래

서대문 지역은 석기시대로부터 거슬러오라가보면 씨족끼리 취락을 이루어 집단생활 및 농경과 수렵·어업활동을 하며 생활하던 곳으로 신촌에서 당시 유물로 흑요석 및 옥수석기 등이 발견되기도 했답니다.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기원전 18년에 백제의 땅이었으나,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점령하였다가 553년에 다시 신라에게 빼앗겼던 땅이기도 합니다. (원래 삼국시대에는 세나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기위해 치열했던 시대인지라~~~) 서대문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쓰게 되었는데요, 조선시대 한양으로 도읍지를 옮기고 그 주변으로 도성이 쌓아짐에 따라 4개문 가운데 하나인 돈의문, 즉 서대문이 건립됨으로써 성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서대문이라는 지역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하나! 다들 많이 알고 있는 ..